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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프랑스에서 태어난 소망이의 한국 정착기

작성자 요즘세상 입력 : 25-02-03 09:51

본문

나는 2003년 프랑스 북쪽에 있는 작은 도시콜마르(프랑스어: Colmar)’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국인,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신 다문화 가정에서 자라 많은 행복을 느꼈다. 덕분에 어릴 때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또래 친구들보다 더 넓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프랑스-한국 혼혈인 나의 이야기와 내가 한국에 오게 된 계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캄보디아에도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혼혈 아이들이 많을 것이다. 나의 이야기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작은 용기가 되기를 바란다.

 

부모님의 만남

아버지는 한국외대에서 프랑스학과를 졸업한 후 1988년 휴학을 하고 프랑스로 오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대학을 다니며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고, 1995년에 결혼해 세 명의 아이를 낳았다. 나는 막내이며, 오빠와 언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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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한국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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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프랑스 결혼식. 사진은 프랑스 도시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찍은 것이다. 이곳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으며, 나의 오빠도 여기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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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오빠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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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돌잔치에서 아버지와 나

 

어린 시절과 혼혈 정체성을 처음 인식한 순간

부모님 덕분에 어릴 때부터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운동, 악기, 공부를 비롯해 여행도 많이 다녔다. 러시아, 스페인,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를 방문했고, 물론 4~5년마다 한국에도 여행을 갔다. 한국에 있는 가족분들도 프랑스에 자주 오셨기에, 자연스럽게 여행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프랑스에 있는 대우 계열사에서 근무하고 계셨다. 덕분에 주변에 한국인들도 많았고, 어머니도 사모님들께 한식을 배운 기억이 있다. 그러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고 신학 공부를 시작해 목사가 되셨다. 그때 우리는 프랑스 남쪽으로 이사를 갔으며, 내 어린 시절의 대부분의 기억은 남쪽에서 살았던 시절과 연결되어 있다.

아버지가 외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나는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언어와 외국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나중에 해외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꿈을 키워왔다. 특히 중학교 때 일본 문화를 접하며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좋아하게 되었고, 일본 여행을 꿈꾸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에 갈 때마다 공항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행복했기에 승무원이 되고 싶다는 꿈도 꾸었다.

그렇게 영어 공부를 열심히 시작했고,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쯤 아버지가 한국어를 가르쳐주지 못하신 것에 대해 아쉬워하시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매일 저녁 식사 후 자기 전 2시간 동안 방에서 혼자 한국어를 공부했다.

 

법학과 진학과 한국으로의 첫 여행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어떤 공부를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언어 공부를 계속할지, 아니면 다른 분야를 선택할지 갈등이 있었다. 나는 언어 공부도 좋아했지만, 그보다 독서를 더 좋아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책 두 권이 있는데, 하나는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의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여성 변호사이자 법학자인 지젤 알리미(Gisèle Halimi)가 쓴 『여성의 대의』라는 책이었다. 이 두 분을 우상으로 삼으며 법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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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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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젤 알리미, 『여성의 대의』

 

법 공부는 정말 재미있었다. 특히 헌법을 배우는 것이 즐거웠고, 지금도 가끔 법학 공부가 떠오른다.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법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법학과 1학년을 마치고 3개월의 긴 여름방학이 있었다. 1년 동안 공부하며 고생을 많이 했기에 어딘가 여행을 가고 싶었고, 한국이 재미있을 것 같아 생애 처음으로 혼자 한국행을 결심했다.

 

한국의 매력에 빠지다

그 여름은 내 인생의 큰 축복이었다. 어릴 때도 한국에 많이 갔었지만, 이번에는 모든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예전에는 한국어를 몰랐는데,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면 이렇게 경험이 달라질 수 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언어,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많은 관심과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 여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감정을 온전히 깨닫게 되었다. 또한, "아버지만 한국인이 아니라 나도 한국인이다"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결국 이중 국적을 취득했고 한국 여권까지 발급받았다. "혼혈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한국에서의 첫걸음

3개월이 지나고 프랑스로 돌아가 부모님께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뜻밖에도 부모님은 반대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나를 응원해 주셨다. 그렇게 프랑스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혼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먼저 어학당에 등록했고, 아버지가 다니셨던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 한국외대를 선택했다. 어학당에서의 공부는 정말 재미있었다. 1 6개월 동안 공부하며, 1년은 한국어만 배우고 나머지 6개월은 영어-한국어 기초 통번역 과정을 들었다.

어학당에서 외국인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고, 혼자 한국에 왔던 터라 가족처럼 친하게 지냈다. 생일도 챙겨주고 크리스마스, 새해, 설날, 추석까지 함께 보냈다. 지금도 가장 친한 친구는 그때 만난 일본 친구다. 한국어가 공통 언어였기에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동기가 생겼다. 그리고 지금도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은 이유 중 하나는 일본과 가까워 그 친구를 자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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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외국어대학교 어학당 졸업식

 

어릴 때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던 나는 이제 미국 문화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할리우드 영화, 미국 작가, 가수, 다양한 연예인들을 좋아하게 되어 대학에서 영어 관련 공부를 하면 어떨까 고민했다. 프랑스로 돌아갈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지 한참 고민했지만, "정답은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섭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내 선택을 응원해 주셨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한국에서의 삶, 그리고 나의 정체성

어릴 때 한국을 방문하며 쌓은 수많은 행복한 기억 덕분에, 어른이 되어서도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성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힘든 순간도 적지 않았다.

프랑스가 그리울 때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나는 막내였고, 집을 떠날 당시 언니와 오빠는 이미 독립한 상태였다. 부모님께서 자식들과 함께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게다가 프랑스는 너무 멀어 자주 돌아갈 수도 없었고, 부모님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그 아쉬움은 더욱 깊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혼혈이라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정체성에 대해 특별히 고민한 적이 거의 없었다. 물론 나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내가 태어나고 자란 프랑스도 너무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반드시 한국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의 외모와 이중문화적 배경 덕분에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고, 덕분에 다양한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혼혈이라는 사실이 싫었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상처를 받았고, 그때는 많이 힘들었다. 특히 사춘기 때는 남들과 다르게 보이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특별함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지금 나는 나의 그대로를 사랑하며 감사하면서 살고 있다.

 

마치며엄마에게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떠나던 날 어머니께서 하신 말이 떠오른다.

엄마는 소망이가 너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한다.

엄마, 미안한데, 제가 한국에 와서 많이 변한 것 같아요. 하지만 엄마가 걱정할 필요 없이 저는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엄마, 아빠를 사랑하기 때문에 매일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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